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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혁 솔로 2집 [Eros] 뇌피셜 해석 Part.2성서조선 2.0 2025. 9. 4. 21:54

이 글은 Part.1에서 이어집니다. 먼저 읽고 오시길 추천드립니다.
이찬혁 솔로 2집 [Eros] 뇌피셜 해석 Part.1
이찬혁의 1집 가운데 [장례희망]이 화제가 되면서 교회 예배 시간에 이찬혁의 노래가 불려지는 상황까지 와버렸습니다.(영상보기) 그만큼 죽음을 대하는 이찬혁이라는 개인의 자세가 기독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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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Show
앞서 비비드라라러브를 통해서 에로스는 찬혁이 추구하던 숭고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비웃습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슬퍼하던 찬혁은 이제 사람들 앞에서 멍청한 척 말을 하고 안웃긴 말에 미소를 짓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무도 그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See me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앞서 Oh Sinny Sinny에서 나왔던 문구입니다. 앞서는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을 직시하는 느낌이었다고 하면 여기서는 그런 세상 앞에 굴복해서 웃고 있는 자신을 TV를 통해서 직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찬혁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그들에게 동화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본래 자신은 돌아버린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돌지 않는 척, 비정상인척 합니다. 에로스의 비웃음 속에서도 그가 붙들고 있던 비비드라라러브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결국 그의 구원은 그 자신에게서는 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직시할 때 내가 해야할 것들이 보이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인 멸종위기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멸종위기사랑
사실 이 곡에 대해서 '신나는 리듬에 비해 내용은 비관적이다'라는 평가들이 있던데,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저 메시지를 왜 신나는 리듬에 담았을까? 그건 멸종된 사랑이 아니라 멸종위기의 사랑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멸종위기라는 것은 아직 멸종하진 않았다는 말이고, 내일이면 인류가 잃어버릴 것이라는 말은 아직 오늘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메시지는 비관적이지 않고 희망적입니다.
우리는 흔히 종말론이라는 것이 절망적인 것, 죽음과 멸망, 종말과 끝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말론과 관련된 이미지라고 하면 지진이 일어나고 기상이변으로 지구가 멸망하는 그런 이야기들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종말론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에 대한 이야기이고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언이라기보다는 계시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정해진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끝을 보여줌으로서 지금 변화를 일으키고, 용서와 화해로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종말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노래는 희망적인 노래일 수 밖에 없습니다.
God mercy on this ground / Where the hell is EROS going
Stop letting this world depraved / Where the hell is EROS going이 곡의 상징적인 코러스는 이 땅을 향한 신의 자비를 구하며, 이 세상이 타락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문장 뒤에 에로스는 도대체 어디 간거냐는 문장이 반복됩니다. 이것은 사랑이 멸종하는 이 상황에서 비비드라라러브 없어도 된다던 에로스는 콧배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에초에 에로스가 말하는 것은 사랑이 멸종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던 것을 사랑이 아니라 한 순간에 흩어지는 여흥과 감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브릿지로 넘어가면서 이 찬혁이 이 노래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나오는데요.
(코러스)News is announcing ’bout its ending
Who’s still gonna sing for the love
(찬혁)People
(코러스) Revive it somehow Revive it somehow뉴스는 그것의 끝에 대해서 알리고 있고 이런 상황 속에서 누가 여전히 사랑을 노래할 것이냐는 물음에 이찬혁은 'People'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뮤직비디오에서도 이찬혁이 갑자기 화면으로 튀어나오면서 "People"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강조하려는 부분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것을 되살려내라는 코러스가 반복됩니다. 즉 이 노래는 사랑의 종말에 대한 비극적 가사가 아니라 멸종해가는 사랑을 포기하지 말고 내일이 아닌 오늘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되살려야 한다는 외침입니다.
비비드라라러브는 없다던 에로스, 그런 것 없는 이 날이 기쁜 날이라고 말하던 에로스는 정작 사랑이 멸종해 가는 이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의 신이라고 하지만 그가 말하는 사랑은 한낱 감정과 여흥일 뿐, 우리의 마음에 불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정작 이 사랑을 되살리는 것은 바로 당신과 나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 돌지 않는 이 세상에서 혼자 돌고 있는 사람들, 세상을 닮아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 바로 이 노래를 듣고 공감하는 당신과 나.
Eve
아담과 이브는 굉장히 모순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첫번째 인간이면서 첫번째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연인 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사랑'의 표본처럼 여겨질만 합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첫번째 인간의 사랑이 실패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에서 태어났으나 죄를 짓고 쫓겨난 인물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죄를 지은 이후에 남에게 원인을 돌리며 반목하는 모습을 똑똑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셨다.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창세기 3:11–12)
그들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첫번째 사랑이었지만 실패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찬혁은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가져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무난한 사랑이야기,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다 같은 이상적인 사랑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노래의 첫 소절은 그렇게 망가져버린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무너진 사랑의 탑 그 속에 너는 나의 사랑
이찬혁이 노래하는 아담과 이브의 사랑은 에덴동산에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탑은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겨누며 서로에게 상처를 줬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으로 완벽할 줄 알았던 사랑이 너무 쉽게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결곡 비비드라라러브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그 뒤에 서로를 원망했다던가, 갈라섰다던가 했다는 이야기를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들이 여전히 부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 그들의 생활이 아름다웠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들의 두 아들 중에 둘째는 질투에 눈 먼 형에 의해서 인류 첫번째 살인의 희생양이 되었고, 첫째 아들도 그 길로 그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성경은 그들이 여전히 함께 부부로 살아가면서 셋째 아들을 낳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없는 것 같은 그 무너진 세상 속에서도 그들은 한 사람당 하나의 멸종위기사랑을 해 나간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를 통해서 찬혁이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우리가 되살려야 하는 사랑은 빛나는 세상에 가득차 있는 그런 완전한 모습의 사랑이 아니라 아담과 이브처럼 망가지고 무너지고 빼앗기고 아파하는 상황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사랑입니다. 에로스가 비웃었던 비비드라라러브는 빛나는 세상이 아니라 망가진 세상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 준 이를 품고 부족하고 망가진 서로를 인정하며 그렇게 기대어 사는 사랑인 것입니다. 바로 이 관계 속에서 찬혁이는 멸종위기의 사랑을 되살릴 불씨를 본 것 같습니다. 죽어간 그 사람이 말하려 했던 비비드라라러브도 사실은 빛나는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망가진 세상 속에서 지켜가야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이찬혁이 아담과 이브라는 상징을 사용한 이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첫번째 아담과 두번째 아담이 등장합니다. 첫번째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아담이고 두번째 아담은 죄를 극복하고 모든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아담입니다.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 15:45)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자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됩니다. 즉, 여기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무너진 사랑의 세상 속으로 자신의 신부를 찾아온 참된 사랑의 본질인 예수가 '아담'으로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빛나는 세상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 무너진 사랑의 탑 안으로 자신의 사랑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너진 현실 안에서 시작되고 완성되며 열매맺는 사랑입니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완전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무너지고 망가진 것들을 거룩함으로부터 내어쫓았지요. 그들에게 결핍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결핍을 향해서 다가오셨습니다. 병자들을 만지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사랑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사랑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는 모두가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무너진 세상을 향해 걸어갔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갔던 엔드류를 만나봅시다.
Andrew
왜 엔드류라고 했을까? 엔드류는 성경 속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인 안드레의 영어식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의 첫번째 제자이고 끊임없이 누군가를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온 것도 안드레였고, 한 소년이 예수님께 자신의 도시락으로 가져온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리도록 안내한 것도 안드레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그리스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요한복음 12:23–26)
이렇게 엔드류는 예수의 길을 따라 걸어간 제자로 대표될 수 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예수의 길로 이끄는 안내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에서 찬혁의 대화상대는 바로 엔드류입니다. 그는 이제 찬혁이 가려고 하는 길을 먼저 걸어갔던 사람이며 본질적으로 그가 가야할 그 길로 안내해주는 안내자입니다. 그런데 엔드류가 안내하는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도시의 중심이 아니라 도시의 끝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괴물취급을 당합니다.
이거 봐 저 표정을 봐
아프지 않은 게 맞나봐
커다란 돌을 던져도
아무렇지 않아 하잖아
괴물 같아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초대교회는 수많은 고난과 핍박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불에 태워지고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위협 앞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도 두려워 떨기보다는 찬양하고 기도하던 그들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굉장히 낯설게 보였을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도 다른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나무위키 중에서 엔드류가 안내하는 길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상하고 소름끼치는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그가 가는 도시의 끝은 예수가 걸어갔던 성문 밖, 십자가가 있는 골고다입니다. 죽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길이고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이런 이들의 모습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 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매력적이지도 반짝거리지도 않습니다. 절대 비비드라라러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그가 그랬듯, 엔드류가 그랬듯, 이제 이찬혁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으려 합니다.
Part.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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