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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찾아서(김제 금산교회)성서조선 2.0 2025. 1. 31. 23:26
이제부터는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나에게 그러하다면,
그대에게는 육신으로나 주님 안에서나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빌레몬서 16절)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골로새 지역에 있던 빌레몬이라는 교회 지도자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오네시모라는 사람에게 가지고 가도록 했습니다. 오네시모는 과거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모종의 사건으로 그는 주인에게서 도망을 쳤고 도망치던 과정에서 바울을 만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바울의 사역을 돕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런 오네시모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주인인 빌레몬에게 그를 형제로서 받아줄 것을 부탁하면서 쓴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신분의 차이가 명확하던 당시 사회에서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달라는 바울의 부탁은 빌레몬에게 굉장히 큰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이후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받아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편지가 성경의 일부로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이유는 사회 질서를 거슬러 복음의 참된 의미를 살아내는 노력이 우리 신앙에 있어서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처음 전해지던 조선 말기에도 이런 신분제도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백정과 같은 교회를 다닐 수 없다고 양반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도 있었으니까요. 그런 시대에 빌레몬과 오네시모처럼 신분을 뛰어넘는 성도 간의 사랑을 보여준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이자익 목사(좌) 조덕삼 장로(우) 이자익은 조덕삼의 집에서 일하던 마부였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처럼 종과 주인의 관계였다는 것이지요. 테이트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영접한 두 사람은 김제 금산교회의 초기 멤버로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이 나란히 교회의 장로 후보가 되지요. 하지만 장로 선출 투표에서 이자익만 장로로 선출되고 조덕삼은 선출되지 못합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금산교회를 개척한 테이트 선교사도 걱정하고 있던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요즘도 장로 선거에서 탈락하면 마음이 상해서 교회도 안나오고 하는데, 계급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던 당시 사회에서 조덕삼이 장로로 선출되지 못하는 상황은 그야말로 교회에 가장 큰 어려움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종이었던 이자익은 장로가 되었으니 조덕삼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금산교회가 처음 시작된 것도 조덕삼이 장소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덕삼의 물질적 후원이 금산교회 성장에 큰 유익이 되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 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조덕삼은 장로 선거 결과가 발표되는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마부 이자익을 섬긴 조덕삼 장로이야기 중에서)이후 조덕삼은 이자익을 신학교로 보내 목사가 되도록 후원했습니다. 그를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품어 안은 것입니다. 지금도 금산교회는 당시 사용되던 'ㄱ자 예배당' 건물을 보전하고 그 안에 당시 교회의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금산교회를 방문해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그 당시의 이야기와 금산교회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들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복음의 토착화를 위한 선교사들의 노력, 신분을 넘어서는 두 장로님의 섬김, ㄱ자 예배당에 반영된 약자들을 향한 배려, 그리고 교회 역사 속 권징의 가치 등... 모든 주제 하나하나가 보석같은 신앙의 가르침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의 이야기는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라 그 전부터 알고 있었고 설교 때 예화로도 많이 사용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그들이 섬겼던 교회를 방문해 보니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어떤 의미였을까를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로서 신분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신분제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는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만약 조덕삼 장로가 세상과 다름 없이 살았다면, 자신의 종이 먼저 장로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과 다른 길을 갔습니다. 자신이 배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 당연하지 않은 사랑을 살아내려 노력한 것입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 나는 무엇을 당연히 여기며 살고 있을까 돌아봅니다. 내가 받은 당연하지 않은 사랑을 기억하며 당연함이라는 이름으로 잃어버린 이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당연히 여기지 않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며 금산교회를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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