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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와 네 친구 이야기성서조선 2.0 2020. 4. 10. 23:48
이 글을 처음 썼던 것이 2007년이니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블로그를 옮겨올 때마다 다시 올리게 되는 글입니다.
우리 동네에는 예수라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데에서 살다 온 사람인데 갈릴리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고쳐준다고 합니다. 어느날 한 친구가 급히 집으로 찾아와서는 예수가 다시 우리 동네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사실 얼마전 그 사람은 종적을 감췄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쳐주고는 스스로 숨어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밖 광야까지 그를 따라갔다고는 하지만 저는 그럴만한 여건이 못됐습니다. 어쨋든 이번 기회에 나는 꼭 그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왠지 그를 만나면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아픔들이 씻어질 것 같고 내 삶이 달라질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서둘러 옷을 챙겨입고 친구를 따라서 집을 나섰습니다. 가다가 다른 친구들도 만났습니다. 모두 저와 같은 마음 같았습니다. 우리 넷이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할때면 우리는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뭔가 잘못된 나의 삶이 새롭게 되길 기대하는 마음...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려는 마음들... 어쩌면 우리가 그 분을 만나러 가는 이 순간, 우린 한마음일지도 모릅니다.
한참 길을 가다가 문득 길가에 누워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도 원래는 우리 친구였습니다. 어릴적엔 같이 잘 지냈는데 크면서 중풍에 걸리는 바람에 지금은 길거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선 아무도 그를 사람 취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병들었다는 것은 그가 죄를 지어 벌을 받았다는 증거니까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몸도 못 가눠서 누워만 있는 그를 곱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동네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친구였던 우리들도 그를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러 가는 지금... 그를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만나고 싶어하는 만큼 그도 예수를 만나고 싶을 것입니다. 우연히 친구들을 바라봤을 때 그들도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중풍병자에게 가서 함께 가자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때, 그냥 돌아섰어도 됐을텐데.. 왠지 그를 꼭 예수께 데려가고 싶었습니다. 우린 겉옷을 벗어서 들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그 들것에 눕히고는 네명이 각 모퉁이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이 친구를 데려가는 동안.. 그는 계속 울었습니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입으로.. 고맙다면서.. 내내 울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사람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도 이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이렇게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를 불쌍히 여겨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도 똑같은 사람이고 그는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삶에 대한 고통이 있듯이 그도 똑같이 그 삶의 변화를 원할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만나고 싶어하는 만큼 그도 예수를 만나고 싶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마음을 알아준 것이 고마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습니다.. 이 친구를 매고 왔기 때문인지 도착했을 때 예수의 집 앞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문밖까지 사람들이 들어차있어서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를 내려 놓았다면 어떻게든 그 분의 얼굴을 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는 중풍병자 친구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 걸지도 모릅니다.
어쨋든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갈 고민을 하던중 한 친구가 지붕으로 들어가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었습니다. 혼자 올라가기도 힘든 지붕을 사람을 매고 올라가자니..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멍청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지붕으로 중풍병자 친구를 밀어올리고 한 친구가 위에서 끌어 올렸습니다. 우리가 지붕으로 올라가자 일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다 우리를 향했습니다. 그중에는 욕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기가 먼저왔는데 새치기 한다고 뭐라하는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같이 거룩한 분이 계신 곳에서 경거망동을 한다고 꾸짖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쨋든 나와는 별 상관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시해버렸습니다.
우리는 대충 자릴 잡고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친구 녀석을 달아 내릴정도로 구멍이 커야했습니다. 집주인에겐 미안한 일이지요. 약간 지붕을 뚫었더니 안이 들여다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앉아 계셨고 그 앞에 약간의 공간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 공간 위에 지붕을 걷어내고 친구를 달아내렸습니다. 그 친구를 달아내리느라고 우린 겉옷을 다 벗어서 들것에 묶어야 했습니다. 어쨋든 지금 중요한 건 그 친구에게 예수라는 분을 만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야 여기서도 그 분을 보고 말씀을 들을 수 있지만 그 친구를 그렇지가 못하니까요..
그렇게 한참 땀을 뻘뻘 흘리며 들것을 지탱하고 있는데, 문득 어떤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아래를 내려다 보았더니 예수님이 우리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입가엔 살짝 미소를 지으시면서.. 우리 꼬락서니를 보면서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왠지 그런 웃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 앞에 내려놓자 예수는 더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너의 죄들이 용서되었다네.."
왜일까요? 그 친구를 향해서 말하는 예수의 음성이 왠지 내 얘기처럼 들렸습니다. 아니, 예수는 우리를 향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우릴 올려다 보시면서 조금 전 보다 더 밝은 웃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쩌면 우린 그 친구안에서 우리를 발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약하고 깨어지고 상처받고 버림받은... 그 친구를 향한 그 선언에서 예수는 이미 우릴 보고 있었습니다. 우릴 향해서 치유와 죄사함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는 율법학자들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이 땅에서 죄사함의 권세는 사람의 아들에게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는 우리 삶에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는 그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를 치유했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다른 사람의 믿음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은 두가지 다른 입장을 모두 서술하면서 함께 나아온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매고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사람들이 어떤 이들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든.. 당시 사회에서 중풍병자를 매고 왔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병은 죄인임을 증명하는 표식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던 한 인간을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를 예수께 드렸다는 것은 유대의 제의에서 희생양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함으로써 자신과 동일시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 사람들이 그런 마음이었는지는 몰라도 성경의 저자는 그런 동일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개념은 정치적인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데려온 것은 도덕적 율법주의라던가 의무감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다분히 인격적이며 관계적입니다.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어떤 목적론적 행위라던가 의식적 선행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고 함께 나아가는 인격적 관계를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죄사함의 능력은 사람의 아들에게서 열매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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