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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예배로의 이행과 주일성수의 정당성성서조선 2.0 2020. 2. 29. 19:52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불이 붙은 온라인 예배로의 이행은 생각해보면 시대적으로 너무 뒤늦은 반응이다. 기독교 방송국이 개국하고, 대형교회에서 독자적인 방송국을 두고 방송 송출을 하고, 그렇게 집에 앉아 하루종일 대형교회 목사님들 설교를 찾아들을 수 있게 되었을 시점부터 이미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 혹은 특정 시간대에 드리는 예배의 정당성은 깨어진지 오래다.
물론 그렇다고 기존의 영상예배가 이런 이행을 대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껏 영상예배는 독립된 예배이기보다는 교회를 홍보하기 위한 홍보수단으로 쓰였다. 더 많은 사람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모이게 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방송송출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교회일수록 '매일의 삶 속에서 드리는 예배'라는 신학적 실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었다. "매일의 삶 속에 신앙적으로 사는 것은 좋지만 주일성수는 따로 해야해" 결국 영성생활까지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로 나오게 하기 위한 동기부여장치의 역할 이상을 하진 못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 속 영성은 특별한 날과 장소에서만 확인 가능한 교세확인을 위해 희생될 뿐이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안식일 준수, 주일성수와는 궤를 달리하는 종교집단이다. 그것은 유대교나 제7일안식교과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제7일안식교는 아직도 토요일을 안식일로서 지킨다. 그러면서 기존 교회의 주일성수는 태양신숭배의 변형이라고 비판한다. 그들말처럼 하나님이 쉬셨다는 안식일은 토요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개신교는 안식일을 지키는 종교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태양신숭배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이전부터 안식후 첫날에 모였다는 기록을 생각할 때 과도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다시 만났던 사건을 기뻐하는 모임을 하고 있는 것이지 어떤 날이 더 특별하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신교는 특별한 날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종교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시간적 정당성을 넘어 공간적 정당성까지 부정하는 종교이다. 이제는 대부분의 교회학교 어린아이들도 아는 것처럼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 성도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건물은 그 모임을 위한 보조제일 뿐이다. 주님이 계신 '성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교회를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강대상은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하는 '제단'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아이러니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개신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에서의 예배를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오늘날 개신교의 예배가 의도치 않게 이런 정당성의 상실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교회공간은 담임목사가 강단에 서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 이야기하는 것을 듣기 위해 앉아있는 공간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성도들이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시간에 하는 대부분의 것을 집에서도 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교회에서 이것저것 장치를 마련하지만 그 행함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특별히 순서를 맡은 봉사자가 아니라면 내가 그 공간에서 걸어다녀야 할 일도, 그 시간에 손을 잡아야 할 일도, 설교자와 대화를 나눌 일도 없다. 예배 후면 몰라도 적어도 예배 동안에 성도가 해야할 일은 듣는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의 가난한 예배가 방송예배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주는 꼴이 된 것이다. 최근 교회들이 예전의 기능에 대해서 재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배에서 성도들이 방관자로 있다면 굳이 TV를 보는 시청자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 공간에 가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요즘은 공연도 그런 식으로는 안한다.
게다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의 양태와도 맞지 않다. 오늘날 특별한 몇몇 사람들과의 관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인터넷 상에서 소비된다. 얼굴보고 이야기하는 시간보다 카톡으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많고 때로는 얼굴도 모르지만 아이디나 닉네임만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 삶을 살던 우리가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서 오프라인의 관계를 향유하며 그것이 진정한 삶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공간에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를 말할 준비가 되었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나의 단톡방에 함께 하시고, 어떻게 내가 쓰는 이모티콘 가운데 역사하시는가? 내 인터넷 방문목록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간증이 있는가?
나는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런 시간적 정당성과 공간적 정당성을 상실한 지금의 교회 양태의 변화가 촉진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본래적인 예배의 의미를 다시 설정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다만 걱정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떠밀리듯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번 온라인 예배로의 이행이 이미 우리의 통제력의 범위를 넘어선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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