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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뿌리는 자의 비유 속 "좋은 땅"의 의미(마가복음 중심)성서조선 2.0 2020. 4. 6. 21:41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믿음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도전을 주는 귀한 비유입니다. 주로 말씀을 듣고 열매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데 사용되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비유해석은 말씀의 성공여부가 그 밭에 달린 것처럼 해석되어지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믿음 좋은 성도에게 들려지지 않으면 말씀은 많은 경우 실패한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죠. 이런 관점은 우리의 구원과 말씀의 능력의 문제를 과도하게 인간의 선함에 의존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뒤 이어서 나오는 비유들은 오히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하거나(막 4:26-29) 예측할 수 없을만큼 크게 자라는(막 4:30-34) 식으로 표현되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3절에서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뒤에 이어지는 비유들을 알 수 없다고, 즉 이 비유가 뒤에 나오는 비유들과 내용상 연계성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요?
먼저 이 본문에 접근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 본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과도하게 현대적인 기준에 맞춰져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부지불식 간에 현대를 사는 우리의 눈으로 뉴스나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척박한 이스라엘 환경을 떠올립니다. 사막과 광야로 가득한 뜨거운 중동의 자연환경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을 만나지 못하면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은 맺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처럼 기계화된 대량생산이 일반적인 사회나, 비옥한 토지로 인해 가을의 황금물결을 쉽게 볼 수 있는 사계절이 뚜렷한 동아시아의 자연이 익숙한 이들에게는 중동의 모래바람 속에서 짓는 농사가 척박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중동 땅에 살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지금같지는 않겠지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도 농사를 짓고 살았고, 일반적인 농사는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며 지어졌습니다. 특히나 이스라엘 사회에서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었고 곡식이 열매를 맺는 것은 이른비와 늦은비를 주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결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흉년은 죄로인한 예외적 결과였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해 이 비유를 듣는 당시 사람들에게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은 예외적 케이스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땅은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하게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레위기 25:23)
그리고 여기서 "좋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καλός는 "좋은, Good"이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올바른, right"의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단어를 다른 땅에 비해 "더 좋은, better"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좋은 땅이란 황량한 땅 가운데 일부 비교우위에 있는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로 서술된 예외적인 땅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올바른/정상적인 땅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나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농사법이 땅을 고른 후에 씨를 심는 방식이 아니라 씨를 먼저 뿌린 후 땅을 갈아엎는 방식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비유에서 이야기하는 땅의 상태들은 그 땅을 갈아엎기 전, 즉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하기 전의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특별히 나쁜 땅의 상태에 뿌려진 것이 아니라 원래 씨는 그렇게 길 위에도, 덩굴위에도, 돌 위에도 뿌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뿌린 후에 갈아엎어서 흙으로 덮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성경은 씨를 '심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뿌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유 속에서 서술되고 있는 실패의 사례들은 이후에 이어질 농부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게 되는 몇몇 예외적인 케이스의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일일이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만큼 그 실패는 예외적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몇몇 예외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뿌려진 씨는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의 법칙을 일반적인 삶의 지혜로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설명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은 '수수께끼'가 아니고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드러나는 실패 아래를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비밀이 되는 것은 비유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듣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라면 당연히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기존의 해석처럼 좋은 땅을 일부의 특별한 케이스로 읽는다면, 이 비유의 촛점은 열매를 맺게 하는 "좋은 땅"에 맞춰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좋은 땅이 일반적 케이스라면 이 비유의 촛점은 예외적인 실패의 변수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뿌려진 씨" 또는 "뿌리는 자의 행위"에 맞춰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들 속에서도 스스로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에 근거한 일반적이고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는 ‘결실한다’는 단어를 미완료형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결실의 사건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늘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말입니다.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교회는 꽤 자주 실패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모범적이었던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그랬지만 교회도 늘 실패하고 부패해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교회의 부족한 모습이 일부의 문제일 뿐 교회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신다고 말하려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심기워졌고, 그 말씀은 우리 안에 시작한 착한 일을 반드시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막지 못합니다. 교회의 실패는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있는 일부 작은 변수일 뿐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교회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말씀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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