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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베스처럼 기도하지 말라 : 다시 읽는 야베스의 기도
    성서조선 2.0 2019. 9. 29. 21:26

    요게벳의 노래 관련된 글을 쓰다가 생각난 김에 전에 블로그에 있던 야베스의 기도 관련 글을 가져왔다. 2009년에 쓴 글이어서 오타 몇가지 고치고 추가적인 내용은 뒤에 붙여본다.


    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문득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든 생각을 남겨본다.

    지금까지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따라야할 기도의 모본은 예수님의 기도이지 성경에 짧게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가 아니다라고만 할 뿐 정작 야베스의 기도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을 해준 책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야베스의 기도가 존귀한 자의 기도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윌킨스의 책을 비판해보려 한다.

    일단 야베스는 그의 기도로 인해 존귀해진 것이 아니다. 성경엔 야베스가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미 존귀한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 그의 기도가 그를 존귀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존귀한 자라는 표현은 '그 형제보다'라는 제한을 가지고 있다. 그냥 존귀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들 사이에서 더 존귀한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존귀함이라는 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어떤 것인지 의문을 갖게한다.

    무엇보다 '존귀한'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존경할만한'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고, 뛰어난 장수를 표현할 때 쓰는 '뛰어난'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또한 공동번역은 이 말을 '가장 세력있는'이라고 번역하였다. 브렌튼은 70인역 영어 번역에서 이 단어를 famous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존귀한'의 의미보다는 더 크고 세력이 있고 기능적으로 뛰어난 혹은 여러사람에게 잘 알려져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가족중에서 그가 존경받거나 뛰어나게 여겨질 이유라면 당시 사회의 문화적인 것을 고려할 때 공동번역의 해석이 힘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공동번역의 번역을 따라가자면 일은 점점 심각해진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기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무엇이 부족해서 그는 더 구하는가? 여기서 '하나님을 위해'라는 말을 붙여 해석하는 것은 본문에 대한 곡해이다. 본문 어디에서 그런 것은 드러나 있지 않다.

    구약의 사회에서 지경을 넓힌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여기서 지경이라는 말은 '경계'라는 말이다. 히브리어 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으면 가장 먼저 나오는 용례는 신명기 19 14절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여기서 옮기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경계표'가 야베스가 넓혀달라는 '지경'과 같은 단어이다. 다른 용례에서도 경계는 가나안 입성과 함께 하나님이 정해주신 각 기업의 경계를 의미한다. 일부 예외적인 구절을 제외하고 이 단어는 다른 용례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고 사람이 옮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야베스는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를 위해서 주의 명령을 어기길 요구한다는 말인가? 성경에 따르면 당시에는 토지의 매매자체가 불가능했다. 돈이 필요할 경우 땅을 빌려줄 수 있었을 뿐이다. 다시 되찾고 싶으면 언제든지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계산하여 값을 지불하고 다시 그 땅을 찾아올 수 있었고 돈이 없으면 가까운 친척이 그 땅을 되찾아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희년이 되면 그 땅은 아무 댓가 없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다. 당시에 경계를 옮길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있었다. 율법을 어기고 자기보다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

    그 당시에 농경사회를 살았던 이스라엘에게 땅을 곧 생존을 의미했다. 더군다나 역대기의 기록연대(야베스의 생존 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를 포로기 귀환 이후로 볼 때 그 당시에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기업을 되찾으려하는 유대인들에게 땅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넓히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 기업을 그대로 되찾는 것이 그들에겐 약속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야베스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불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비전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내 형제가 죽어도 상관없으니 내꺼 크게 해달라는 기도를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땅과 관련된 비슷한 이야기가 하나 나온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 당시 포도원을 팔 것을 요구했던 아합왕의 요구에 물려받은 기업이라 팔 수 없다는 나봇을 이세벨이 죽인다. 시돈의 딸인 이세벨과 아합이 결혼하면서 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기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물신숭배 사상이 이스라엘을 뒤덮으면서 이스라엘의 전통적 토지체제는 붕괴하게 된다. 이처럼 성경에서 우상의 숭배는 단순히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넘어서 그 사회체제 자체를 뒤바뀌는 것이다. 여호와가 버림받고 바알이 이스라엘을 지배한다.

    물론 야베스의 시대를 확정할 수는 없다. 역대기의 족보가 워낙 광범위한데다가 야베스의 이야기는 족보와 거의 독립되어서 쓰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뻔뻔한 외침이 가능했던 시기라면 그 때 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도 악인이 승리하는 것 같은 그 시대에도 역사를 끌어가시는 것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렇다. 브루스 윌킨스의 말이 다 맞다 치자. 그래도 이 책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 다름 아닌 역대상 4:9~10절의 주인공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기도를 들으신 것은 하나님이다. 야베스의 기도가 뛰어난 기도여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신 것이다. 여기다 중요 표시 몇개를 해야 이 중요성이 표현될 수 있을까? 그 기도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 기도가 뛰어나서 하나님이 들으신 것이 아니다.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요, 결정이다.

    도대체 그렇게 이기적이고 불법적인 기도를 하나님이 왜 들으셨는지는 그냥 모르는 것으로 남겨둬야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순히 기도를 들어주셔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와 그의 기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부자는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부자가 되었고 가난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은 하나님이 저주하셔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다.'

    십일조 많이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NO! 그 사람을 부자 만드는 것은 그가 십일조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내가 쓰임 받겠다고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릴 쓰시기 위해 다른 일들을 하신다. 앞뒤 순서가 잘못되도 너무 잘못됐다. 해석이야 각자 다를 수 있다치더라도 기도의 주체가 누구인지만은 분명히 해야하지 않을까?


    여기서부터 추가분

    2009년에 이 글을 쓸 때는 아마도 내가 개역한글판을 썼나보다. 당시에 야베스의 기도 책자 역시 개역한글판을 썼고 관련해서 나온 노래도 개역한글판을 썼기에 당시에 야베스의 기도 본문은 아래와 같았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런데 오랫만에 글을 수정하려고 봤더니 개역개정에서는 아래와 같이 번역하고 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냥 복을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려거든 이런이런 복을 달라는 표현으로 읽힌다. 이 부분은 오히려 내가 위에 썼던 내용과 연결이 잘 되는 것 같다.

    물론 9절에서 '존귀한 자'라는 표현을 '귀중한 자'라고 번역한 것은 뒤에 이어지는 어머니가 그를 수고롭게 나았다는 언급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번역이 아닐까 싶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동번역의 표현이 활력있게 들린다. 물론, '귀중한 자'라는 표현을 야베스가 이런 악한 기도를 드리게 된 원인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부모가 어렵게 낳아서 오냐오냐 '귀하게' 키우는 바람에 이렇게 앞뒤 모르는 기도를 드린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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